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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 가정의 신앙생활(사도행전 10:1-8)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엘가나와 한나 가정과는 반대입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넬료는 신앙적인 유산이나 믿음의 계승이라는 말과 …
Source: www.imr.co.kr
Date Published: 10/23/2022
View: 7687
예배의 가정 고넬료, 교회가 되다 – 뉴난한인교회
예배의 가정 고넬료, 교회가 되다. 사도행전 10:1-8. 2020년 7월 12일. “나는 예배자입니다” 시리즈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네 마음을 다하고 …
Source: www.newnankumc.org
Date Published: 8/28/2022
View: 3836
사도행전 10:24-48 / 고넬료의 가정 – 네이버 블로그
그 가정은 로마 백부장 고넬료 가정입니다. 고넬료는 유대인이 아니고 로마 군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고넬료와 그의 가정을 소개하는데 사도행전에서 48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3/7/2022
View: 6871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 > 설교자료실 | 기독정보넷(cjob)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본문 성경 : 행 10:1~161997년 4월 27일 주일3부예배 설교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이달리야대 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요절 …
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8/5/2021
View: 3475
<말씀> 고넬료 가정이 천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 – 한국성결신문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559장의 노랫말을 지은 전영택 씨는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하니 한간의 초가 …
Source: www.kehcnews.co.kr
Date Published: 2/30/2021
View: 3126
[가정의달] 고넬료의 가정처럼 … (행 13:1~8) – 기멀전
그런 취지에서 오늘은 성경 안에서 가장 모범적인 가정 중 하나인 ‘고넬료의 가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가정과 우리 가정을 비교해 보면서 …
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6/11/2021
View: 2744
2월 2주 고넬료의 가정 > 목장자료실 – 장산교회
제목> 고넬료의 가정 성경> 행10:1-6 찬송> 301, 558. ○들어가면서 – 명절에 생각하는 ‘가족’. 설날 연휴를 강건하게 잘 보내셨나요? 명절이 다가오면 기독교 가문이 …
Source: www.jangsan.or.kr
Date Published: 3/18/2021
View: 9118
월별 설교 – mission – 고넬료 가정처럼 (행10:24-25)
특히 청교도 가정의 3대 교육지침이 아주 본받을만 합니다. 첫째 자식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하나님의 것으로 드리는 믿음을 전제 …
Source: mission.bz
Date Published: 6/18/2022
View: 4227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고넬료 의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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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고넬료 의 가정
- Author: 말씀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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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4. 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FSxeYlc5x8
사도행전 10:24-48 / 고넬료의 가정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가정은 인간에게 소중하고 평온한 쉼터를 제공합니다. 가정은 행복을 만드는 발전소입니다.
가정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좋은 계절 5월에는 어린이 날(5일), 어버이 날(8일), 부부의 날(21일)이 다 모여 있습니다. 특별히 5월은 서로 우리 가족들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달입니다.
성경을 보면 많은 가정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온전한 가정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가정마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완전한 인간이 없듯이 완전한 가정 또한 없습니다. 어느 가정이나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가정들의 불완전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라고 위로를 받습니다. 하지만 위로만 받을 것이 아니라 모범 가정을 통해 도전도 받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가정이 있습니다. 그 가정은 로마 백부장 고넬료 가정입니다. 고넬료는 유대인이 아니고 로마 군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고넬료와 그의 가정을 소개하는데 사도행전에서 48절이 되는 긴 한 장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백부장 고넬료는 이방인으로서 결코 흔하지 않은 믿음을 보여 주었고, 그의 가정 또한 보기 드문 이상적인 가정이었고, 온전한 가정이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면 고넬료의 가정은 어떤 가정이었을까요?
첫째로, 고넬료의 가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었습니다.
고넬료 이야기는 사도행전 10장 1절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라고 고넬료의 신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로마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자기 나라의 종교도 아닌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로마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다른 나라의 신을 믿는다는 것은 로마에 대한 불충성으로 비춰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넬료는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의 신앙은 형식적인 신앙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24절을 보면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초청하여 가정예배를 드리고자 할 때 가족뿐 아니라 그의 친척, 그리고 그의 친구들까지 불러 모았던 것입니다.
남편만, 아내만, 자녀만이 주님을 섬기는 가정이 아니라 전 가족이, 나아가 그의 주변 모든 사람들이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 주님을 섬기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가부장적인 고대 사회라 할지라도 전 가족이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고넬료의 가정을 기뻐하셨고 그의 가정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지고 나라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 현실을 보면 좋은 집은 늘어나는데 좋은 가정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아무리 크고 호화로운 집이라고 할지라도 그 안에 평안과 쉼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리 초라해도 쉼이 있고, 평안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웃음이 있고, 행복이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정이 붕괴되고 있는 이 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음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 이상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온 가족이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 이보다 더 자랑스러운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이 우리 가정에 필요합니다.
둘째로, 고넬료의 가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정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22절을 보면 베드로를 찾아간 고넬료의 종들은 베드로가 왜 왔느냐고 물을 때 베드로를 향하여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라 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25절을 보면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아래 엎드리어 절하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넬료의 종들이 베드로를 초청하는 모습과 고넬료가 베드로를 영접하는 모습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큽니다. 고넬료의 종들은 거만하게 베드로를 불렀지만 고넬료는 하나님을 대하듯 베드로를 영접했습니다.
고넬료는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며 인사했고, 본문 33절을 보면 가정예배가 시작될 때에 고넬료는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완벽한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좋은 씨앗도 필요하지만 좋은 밭도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고넬료는 베드로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 받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도 바울의 설교를 들었을 때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하느니라” 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신앙 자세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언제, 누구에게 역사하실까요?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말씀은 그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무수한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크게 변화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말로 듣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을 거울로 삼아 우리의 말씀 듣는 자세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할 때, 기도할 때,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 앞에 있다는, 하나님 임재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셋째로, 고넬료의 가정은 성령이 임한 가정이었습니다.
본문 44-45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고넬료 가정은 성령이 함께 하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본문 46-47절을 보면 베드로는 이 사건에 놀라고 감동하여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고 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와 역사는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관계에서, 그리고 교회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고 적용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 삶 전반에 관여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가정에도 함께 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성령이 함께 하는 가정의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찬송 가사가 있습니다. 성령이 임한 가정은 이 땅의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이든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하는 가정에는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또한 성령께서 하시는 중요한 역사는 하나 되게 만드는 일입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을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십니다.
가정은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가정은 가족들 간에 유기적인 관계로 얽혀 있습니다. 가족들이라고 해서 항상 관계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의견 차이가 있고, 갈등이 있고, 때로는 다툼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지지고 볶으면서도 한 지붕 아래서 함께 뒹굴며 사는 것이 가족이고, 그런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의 가정 공동체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서로 편하게 살겠다고 뿔뿔이 흩어져, 1인 가구가 날고 증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가정 공동체를 지키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가정이 공동체로서 존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함께 하심이 필요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을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모든 인간관계, 특히 가족 관계의 윤활유입니다. 온 가족이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이 함께 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가정을 잘 이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이 가정다워지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고넬료는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과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고넬료의 가정을 통해서 교훈을 받고, 고넬료 가정을 본받아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행복이 넘치는 가정을 이루는 성도들이 됩시다.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 > 설교자료실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본문 성경 : 행 10:1~161997년 4월 27일 주일3부예배 설교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이달리야대 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요절 : 행 10:1~16)성경을 읽으면서 아름다운 가정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것은 고 넬료의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이 그를 향하고 있었습니다.따라서 우리 교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얼굴이 항상 향하는 축복 을 받기 원하는 마음으로 이 시간 고넬료의 신앙에 관하여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그리하여 고넬료에게 주었던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은혜, 항상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 원합니다.고넬료는 다음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1) 가이샤라 출신이었습니다.이곳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의 동족으로 여기지 않던 지역 이었습니다.2)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3) 이탈리아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그 당시의 군대조직은 열 명을 다스리는 십부장, 오십 명을 다 스리는 오십부장, 백 명을 다스리는 백부장, 천 명을 다스리는 천 부장, 만 명을 다스리는 만부장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에서 백부장은 오늘날 군대의 중대장에 해당되는 직책입니다.4) 인가귀도(引家歸道)된 가정이었습니다.성경에서 “온 가족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고넬료의 가정이 인가귀도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가귀도라는 말은 끌 인(引), 집 가(家), 돌아갈 귀(歸), 길 도(道)로 온 식구가 예수 믿는 집안이 되었다는 뜻입니다.5)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경외(敬畏)라는 말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감사와 존경을 한 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고넬료는 하나님을 무서워 한 것이 아니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6) 백성에게 구제를 많이 하였습니다.7)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고 싶어 서 몸살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을 두 려워했기 때문에 그 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생각 끝에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지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고 싶다. 그래서 너를 통해서 복을 주면 좋겠으나 그들은 너도 무서워했다.”왜냐하면 그들은 모세가 지팡이를 던지면 뱀이 되고 뱀이 꼬리 를 잡으면 다시 지팡이가 되었으며 또한 손을 품안에 넣으면 문둥 이가 되고 다시 손을 품에 넣으면 깨끗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모 세를 두려워하여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런데 이스라엘 백성과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론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민수기 6장 22~27절은 이와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와 같이 축복하 여 이르기를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시 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 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 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 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사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고넬료는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 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꼭 필요한 것이 한 가지 없다는 것을 아시고 그것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어느 날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찾아 와서 질문을 하였습니다.”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 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증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청년이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하고 대답 하자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누어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그러나 이 말을 들은 청년은 부자이기 때문에 큰 실망을 하고 돌아갔습니다.예수님은 힘없이 돌아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보면서 “재물이 있 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 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눅 18:24~25) 고 말씀하셨습니다.깜짝 놀란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하고 묻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 18:27)아마 부자 청년은 예수님은 가난한 자만 생각하시고 나 같은 부 자는 인정치 않고 돈만 생각하는 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 만을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청년 그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재주도, 지식도, 재 물도 아니라 흠이 있거나 부족하거나 병이 들었거나 무능하거나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부족합니다. 나를 도와 주십시오.” 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돕는 역사가 임하게 됩니다.고넬료에게 말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신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을 주고 싶었습니다.첫째, 고넬료는 환상을 보았습니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환상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비극적인 사 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는 환상을 보는 성도 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사도행전 2장 17절은 이와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 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 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점쟁이들은 과거는 잘 맞춥니다. 그러나 과거를 잘 맞춘다고 해 서 미래도 맞출 것이라고 결코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마 귀는 과거를 들추어내어 꼬집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과거를 묻지 않고 미래를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캐나다에 갔을 때 양옥태 장로님에게 그의 아들의 이름을 말했 더니 “어떻게 우리 아들의 이름을 기억하세요?” 하면서 대단히 좋 아했습니다.이처럼 장 목사가 이름을 기억해도 좋은데 하나님께서 여러분 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마 밤잠을 자지 못할 것입니다.어느 날 여리고를 지나가던 예수님은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 를 바라보시고 생면부지(生面不知)임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 다”(눅 19:5)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은 영접한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눅 19:9) 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냐는 것 은 그가 복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배를 드리면 서 은혜를 받고 환상을 통하여 기쁨과 감격 속에서 “아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고 계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 다.둘째, 천사가 고넬료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였습니다.기도하는 고넬료에게 나타난 천사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뜻 을 전하였습니다.”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 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 하라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있느니라”(행 10:4~6)고넬료는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생각을 조금도 첨가하지 않고 하인 중에서 경건한 사람 둘을 욥바로 보냈습니다.그러므로 고넬료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지시 받은 것 그대로 순 종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은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셋째, 말씀을 통하여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고넬료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게 되었습니다.베드로는 설교를 하면서 “회개하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 러나 바울은 회개하라는 말 대신에 “주 예수를 믿으라” 하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왜냐하면 베드로는 이미 율법적으로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유 대인을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했으며 바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 는 이방인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만약 여러분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에게 가서 “회개하시 오” 라고 말한다면 “나는 죄지은 것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할 것 입니다. 왜냐하면 회개의 의미를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이러한 사람에게는 ” 예수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 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만날 때마다 다음과 같이 전도 하였습니다.”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베드로가 고집을 부리면서 이방인을 상대하지 않자, 하나님은 베드로가 기도하기 위해 지붕에 올라갔을 때 환상을 보여 주었습 니다.”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 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행 10:11~13)깜짝 놀란 베드로는 이와 같이 대답하였습니다.”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 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그 순간 다음과 같이 소리가 들렸습니다.”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이런 일이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있은 후 그 그릇은 하늘 로 올라갔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던 베드로는 고넬 료가 보낸 사람들이 그를 모시러 왔다는 것을 들었을 때 비로소 그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베드로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고넬료는 마치 상감마마를 영접 하듯이 베드로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그를 환영하였습니다.그러나 베드로는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다” 라고 말한 후 집안 으로 들어가 그 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차근차근 전하였습니다. 그때 성령이 임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 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행 10:44~46)그러므로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처럼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 말씀이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케 해서 말씀 충만이 곧 성령 충만이요 성령 충만이 곧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되 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아멘 -[장광영목사]
고넬료 가정이 천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559장의 노랫말을 지은 전영택 씨는 “어버이 우리를 고이시고 동기들 사랑에 뭉쳐있고, 기쁨과 설움도 같이하니 한간의 초가도 천국이라”,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이요, 언제든지 쉼을 얻을 수 있는 안식처입니다.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모든 가족이 화목하게 지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갈등을 겪으며 서로에 대해 외면하고 있지는 않나요? 성경 속에 묘사된 고넬료의 가정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가정의 모습을 보길 원합니다.
본문에 따르면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이달리야 부대의 백부장으로 로마 장교였습니다. 이 사람은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섬긴 모범적인 신앙인이었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온 가족이 하나님을 잘 믿는 가정이었습니다. 2절을 보면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맺으면 나와 가정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과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그의 가정도 경건한 가정이었습니다. 온 식구가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가정이었던 것입니다. 온 가족이 말씀대로 살고 온 식구가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화목한 가정이었습니다. 그 가정이야말로 진정한 천국 가정입니다.
두 번째 고넬료는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집에 천사를 보내십니다. 천사는 고넬료에게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말합니다. 고넬료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시고 기억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 고넬료 가정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우리가 은행에 저금한 돈은 언제, 어디서, 얼마를 저금했는지 이자까지 다 찍혀있습니다. 우리가 구제하고 남을 도와준 것은 시간이든 물질이든 마음이든 정성이든 전부 다 하늘나라에 입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보물을 쌓아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아 달라고 구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4절에 “하나님이 기억하신바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고넬료가 한 일을 전부 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다고 했습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수직적으로 하나님을 잘 믿고 수평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많은 백성에게 구제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넬료의 가정은 의로운 가정이고 칭찬받는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물론이고 유대인과 그들이 부리는 종들도 그들을 칭찬했습니다. 우리 가정도 고넬료의 가정과 같이 하나님께 칭찬 받는 가정이 됩시다.
[가정의달] 고넬료의 가정처럼 … (행 13:1~8)
– 설교 : 홍문수 목사 (신반포교회)
5월 가정의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을 없을 겁니다. 그러기에 가정에서는 물론이고,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정의 달 행사로 분주합니다. 정신없이 사는 현대인들이기에 이렇게 해서라도 가정을 챙기는 게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행사들이 연례적인 겉치레로 지나간다면,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 이상의 유익이 없습니다. 행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가정에 대한 깊은 성찰입니다. 우리 가정의 형편을 잘 살펴보고 반성하면서 더 좋은 가정으로 만들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진정한 가정의 달로서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런 취지에서 오늘은 성경 안에서 가장 모범적인 가정 중 하나인 ‘고넬료의 가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가정과 우리 가정을 비교해 보면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더 좋은 가정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고넬료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1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 제국의 도시인 가이사랴에 주둔하던 로마 군대(이달리야대)의 백부장입니다. 백부장은 당시 100명의 군인을 통솔하는 군인입니다. 요즘으로 하면 중대장에 해당되지만, 그 지위와 권세는 비교가 되지 않게 컸습니다. 대개 식민지 주둔군이 그렇죠. 옛날 일제 치하에 일개 순사만 되어도 얼마나 세도를 부렸습니까? 그런 점을 감안하면 백부장은 그 당시 상당한 지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은 아주 잔인했습니다. 정복자로서 횡포를 부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넬료는 아주 훌륭한 신앙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유의할 사항입니다. 당시 1세기는 과도기였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넘어온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이었으므로 개중에는 그 신앙이 아직 구약의 상태로 머물러 있던 신앙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0장 뒷부분을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를 통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혹시 처음 믿는 초신자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아직 예수님을 소개받지 못했지만, 이미 경건한 유대인들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소개 받고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범이 될 정도로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모범이 되는데,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가정 중심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고넬료의 가정에 앵글을 맞추고 본문을 살펴보도록 합니다. 본문을 보면 고넬료의 가정이 다음의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가정을 이룬 것입니다. 하나씩 살펴보고 저와 여러분의 가정도 고넬료 가정처럼 좋은 가정들로 만들어 가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1] 신앙이 있는 가정2절 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 ”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넬료는 혼자만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온 가족으로 하여금 다 함께 믿게 했습니다. 온 가족이 다 함께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정 행복의 기본입니다.
여러분, 왜 그렇습니까?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고 교회나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가치관이요, 인생관입니다. 말하자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며 방향감각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들이 신앙이 있고 없고 하면 서로 다른 가치관, 인생관을 갖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될 텐데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불화의 요소가 항상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집안에 원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신앙이 통일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불신앙으로 통일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죠. 그것은 다함께 멸망하는 길입니다. 신앙은 내세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고 결정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그렇지, 사실은 현세보다 내세가 더 중요합니다. 현세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게 당장은 중요하죠. 그러나 내세에 관해 무지한 채 살아간다면, 그것은 아주 어리석인 일입니다. 현세는 잠깐입니다. 반면에 내세는 영원합니다. 아무리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잘 먹고 잘 산다 하더라도 내세에 실패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16:26 “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기서 ‘목숨’은 ‘영혼’을 가리키는데, 영혼이 내세에 지옥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 받으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눅16:19 이하의 말씀을 보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는 비참한 현세의 삶을 살았지만 신앙이 있었기에 천국에 들어가 영생 복락을 누립니다. 반면에 부자는 모든 게 다 있어도 신앙이 없었기에 음부에 들어가 고통을 겪게 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머리 보이는 아브라함에게 요청합니다. 나사로를 시켜서 물 한 방울만이라도 갖다가 혀에 축여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죠. 그러니까 이번에는 세상에 있는 자기 형제들에게 이 비참한 사실을 알려줘서 제발 오지 않도록 전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거절당합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나 홀로 신앙은 곤란합니다. 가정 복음화를 위해 수고해야 됩니다. 제일 좋은 것은 가장이 먼저 예수 믿고 그로 인하여 차례차례 믿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다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가족 중에서 위치가 어떠하든지 먼저 믿은 사람이 우선 “내가 가정의 제사장이다” 생각하고 나머지 가족들을 기도하며 인도하면 됩니다. 한 피 나누고 한 지붕 밑에서, 심지어 한 이불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 하나는 천국, 하나는 지옥 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습니까? ‘영원한 이산가족’이 되는 겁니다. 물론 가족을 전도한다는 게 만만치 않습니다. 차라리 남을 전도하는 게 쉽죠. 그러나 우리가 뜻을 정하고 기도하며 수고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이뤄주실 줄로 믿습니다.
물론 선조로부터 신앙을 자연스럽게 물려받으면 더 좋겠죠. 그러나 초대신앙도 축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초대신앙의 경우 시험도 많고 갈등도 많지만, 그래도 보람이 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대대로 내려오던 불신앙의 고리를 끊고 나로부터 앞으로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자자손손 믿음의 가문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이를 위해 특별히 자녀들에게 신앙을 잘 전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재산 물려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공부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 물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해 봅니다.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조금 주는 것이다. 공부시키는 것은 많이 물려주는 것이다. 신앙을 물려주는 것은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다.” 또 이렇게 비유해 봅니다.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물고기를 주는 것이다. 공부를 시키는 것은 낚시질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신앙을 물려주는 것은 배와 그물을 주고, 그물질하는 법까지 가르쳐주는 것이다.” 재산을 물려주고 공부를 시키는 게 나쁘다는 말은 아니죠. 우선순위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분들이 우선순위를 지키지 못합니다.
한번은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 대학 캠퍼스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건물 앞에 설립자 하버드 목사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다 까만데 발등만 반들반들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하버드의 발을 만지면 자녀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겁니다. 저도 만졌죠, 뭐. 그런데 우리 아이들 성적이 안 올라가더군요. 물론 괜한 소리죠. 부모 마음은 다 같은 겁니다. 미국인 부모나 한국인 부모나 자녀가 공부 잘하는 것은 동일한 소원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자녀의 신앙을 위해 더 큰 소원을 가져야 됩니다. 부디 여러분의 가정이 고넬료 가정처럼 온 가족이 자자손손 예수 믿고 복을 누리는 가정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사랑이 있는 가정본문 2절 다시 보면 “온 집으로 더불어 … ” 그랬습니다. 이 말은 온 가족이 신앙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지만 더 나아가 한 마음 한 뜻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가득한 화목한 가정이었을 겁니다. 행10:24 보면 사람을 보내서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해 놓고 일가친척까지 다 모여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정도면 화목한 가정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가정은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물이며,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창1:27 보면 인간을 창조하되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습니다. 그 말은 가정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모든 창조 세계를 보시며 뭐라고 하셨나요? 창1:31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이 말씀은 창조 세계의 완벽함과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아름다움, 그 중에서도 가정의 아름다운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가정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행복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대로만 살아가면 천국과 같이 아름답고 행복해집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살아가면 지옥과 같이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뭐겠습니까? 한 마디로 ‘사랑’이죠. 사랑은 비유컨대 ‘가정의 산소’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질식합니다. 지옥 같은 고통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사랑이 있으면 편안합니다. 천국 같은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에 사랑이 있으면 지상 천국이 되고, 사랑이 없으면 지상 지옥이 되는 겁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가정들 가운데서도 과거 지옥 같은 고통 속에 있다가 예수 믿고 변화되어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천국 같은 가정으로 변화된 케이스가 적지 않으실 겁니다.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도로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죄성의 기본 특징이 이기심이거든요. 부부 사이, 부모 자식 사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관계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그 사이에서도 이기심이 발동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지없이 관계가 깨어지고, 불화가 생깁니다. 그리고 일단 가정불화가 생기면 대책이 없습니다. 물질이 있으면 뭐하고, 명예 권세가 있으면 뭐합니까? 인생이 마냥 괴로워지는 겁니다.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런 경우 유일한 치유책은 오직 하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사랑은 다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뜨겁던 부부의 사랑도 세월이 가면 식어집니다. 자식은 부모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배은망덕합니다. 가장 고상한 부모의 사랑조차 때로는 변질됩니다. 다 이기심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완전합니다. 사49:15 보면 인간의 불완전한 사랑과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비교해서 설명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인간사랑 중 최고인 부모 사랑조차 때로는 불완전하다는 겁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아가페 사랑, 이타적인 사랑만이 참 사랑입니다.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십자가에 죄인들의 대신해서 피 흘려 희생하신 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체험하고 배우면 인간관계가 이기적인 관계에서 이타적인 관계로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행복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불신 가정은 물론이고, 신앙의 가정에서조차 참 사랑을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신앙은 갖고 있으되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 겁니다. 성숙하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옛 사람의 이기적인 모습을 살아가면 참 사랑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오직 성숙한 자, 즉 성령 충만한 자만이 이타적인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성령 충만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겁니다. 그러면 참 사랑이 가능해집니다. 엡5:22~6:4에 보면 부부 사랑, 부모 자식 사랑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식을 오직 하나님 말씀으로만 가르치고 … 그런데 이게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왜 그래요? 인간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서로 자기를 위해 달라고만 하므로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성령 충만해야 됩니다. 그래서 앞에 엡5:18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그럴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예수님이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사랑이 뭡니까? 말은 많이 하지만 때로는 막연한 느낌이 듭니다.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양보하고, 섬기고, 희생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도 막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간 아주 간단한 것을 제안해 봅니다. 우리 가정에 행복과 불행이 말 몇 마디로 좌우될 수도 있습니다. 말로도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면 다른 것은 볼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말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나하나 실천해 나아가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이런 기본적인 것부터 부족해서 많은 불화와 문제들이 야기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언어부터 사랑의 언어로 바꾸면 좋겠습니다. 언어를 통해 가정의 행복이 깨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사랑의 언어가 부족합니다. 이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사실은 엄청나게 큰 문제입니다. 언어에는 하나님이 신비로운 능력이 있습니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언어에는 사망의 언어와 생명의 언어가 있습니다. 생명의 언어는 무엇입니까? 별로 어려운 게 아닙니다. 아이들도 할 줄 아는 말입니다. 사랑, 용서, 칭찬, 격려, 감사, … 이런 것들을 표현하는 겁니다. 참 이상하게 이런 게 우리에게 아주 부족합니다. 이런 것들은 표현하지 꼭 화가 나고 미움이 생길 때만 그런 마음을 마구 표출합니다. 그러니까 사소한 일로 엉뚱하게 가정의 화목이 깨지곤 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언어를 잘 구사해야 합니다.
어느 가정에서 딸아이가 휴대폰을 갖고 문자 메시지를 합니다. 옆에 있던 엄마가 신기하게 바라봅니다. 딸이 가르쳐주니까 더듬 더듬 따라합니다. 처음 배워서 누구에게 제일 먼저 보낼까 하다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금세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 지금 뭐 하는 거야?” “뭐긴요, 나도 문자 배웠지.” “근데 왜 ‘여보 사망해’라고 보낸 거야?” “예? 나는 ‘여보 사랑해’라고 했는데 … ” ㄹ 자판 누를 걸 옆에 있는 ㅁ 자판을 잘못 눌렀던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한 실수였습니다. 이처럼 어색하고 서툴더라도 자꾸 표현해야 합니다. 그럴 때 가정에 사랑이 충만해 질 것입니다.
사실은 생명의 언어가 별 게 아닙니다. 몇 가지 말만 잘 해도 충분합니다. 고마워, 미안해, 괜찮아, 사랑해 이 정도만 해도 됩니다. 외국어도 그렇잖아요. 이 몇 가지만 배워 놓으면 대충 통합니다. 가정에서 이렇게 쉬운 말들만 잘 표현해도 분위기가 확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가정들이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해져서 지상의 작은 천국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3] 사명이 있는 가정본문 2절을 다시 보면 후반 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 …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 ” 그랬습니다. 그의 가정은 받은 축복을 이웃과 나누는 가정이었습니다. 행10:24에는 베드로를 청해 놓고 일가친척들은 물론이고 친구들도 불러 모았습니다. 이웃과 복음을 나눈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넬료의 아름다운 인격은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행10:22) 이런 가정이었기에 하나님은 고넬료 가정을 사용해서 베드로의 편견(이방인을 배제하고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벗겨 주는 역할을 감당하게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로 성장한 것,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 등의 배경에 고넬료 가정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가정에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구원의 복음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가족들끼리 말 먹고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웃과 세상을 향해 복을 나누는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실 때의 목적이 바로 복의 근원(=복의 통로)이 되게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과 가정은 축복의 웅덩이가 아닙니다. 흘려보내는 축복의 시냇물입니다.
이렇게 사명을 감당할 때 그 가정을 하나님이 더욱 풍성하게 축복하십니다. 잠11:24~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구제하고 나누는데 신기하게 더욱 풍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 빌립보교회에서 에바브로 디도 집사를 통해 선교비를 전달받았습니다. 그때 바울은 감사하면서 하나의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빌4:17~19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복의 통로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축복해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물의 원리와 같습니다. 물을 퍼내면 밑에서 새 물이 솟아올라옵니다. 그러나 우물에서 물을 퍼내지 않으면 서서히 썩어가는 것입니다. 축복을 나눌 때 더 풍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이 있는 가정은 늘 하나님의 축복으로 풍성합니다. 꼭 이런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고넬료의 가정은 이처럼 신앙이 있고 사랑이 있고 사명이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행복이 있고, 영광이 가득한 가정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고넬료의 가정과 비교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디 고넬료의 가정 같이 지상의 작은 천국 만드시고, 행복한 인생 의미 있는 인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월 2주 고넬료의 가정 > 목장자료실
제목> 고넬료의 가정
성경> 행10:1-6
찬송> 301, 558
●들어가면서 – 명절에 생각하는 ‘가족’
설날 연휴를 강건하게 잘 보내셨나요? 명절이 다가오면 기독교 가문이 아니면 영적인 갈등을 겪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이번처럼 주일과 명절이 겹치면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 혼자 살지 않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가장 가까이에 혈연을 중심한 우리의 가족과 친척들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고넬료의 가정‘을 통해 가족, 가정, 가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고넬료 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1. 이방인 가정으로서 여호와 신앙을 받아들인 가정입니다.
고넬료는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 간부로 유대의 가이사랴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백부장입니다. 백부장이 뭐 그렇게 대단한 지위냐고 할지 모르지만 식민지에서 지배국이 파송한 치안담당 장교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 신문의 로마인으로서 식민지 국가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2절에 보니, 그 로마인 이방인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지배국의 고관이라고 하면 식민지 종교는 더욱 천하게 보고 무시하는 것이 보통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고넬료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는 유대에 와서 유대인들이 믿는 독특한 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신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제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다른 어떤 신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느 샌가 그 종교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유대인들이 하는 기도시간에 함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2b-3a.)
이런 고넬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고넬료는 기도중에 천사를 만나게 되고 천사는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합니다. 24절에 보니, 초청할 때 자신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친척까지 다 모아 베드로를 기다립니다. 여기서 가문의 의미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가정에 찾아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이들이 모인 곳에 성령이 임합니다. 그 현장에 있었던 베드로도 놀랍니다. 그렇게 하여 이 가정은 예수 믿는 최초의 이방인의 가정이 됩니다.
이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이후 세계 선교에 놀라운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로마 교회의 설립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의문을 가집니다. 그것에 대해 또한 많은 사람이 답을 제시합니다. 그 중에 가장 타당한 답 중에 하나가 가이사랴에서 파송 임기를 마치고 돌아간 고넬료 가정입니다. 고넬료가 로마교회의 태동에 상당한 기여를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 이런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도 집안이 신앙으로 하나 되지 못하여 가슴 아픈 성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명절만 되면 신앙문제, 종교문제 때문에 걱정이 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집안 어른과 형제를 만나기가 부담인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언제 이 문제가 해결되나 숙제인 가정이 있을 것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하나님을 몰랐던 가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가문이 변할 것입니다.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삶의 증거가 있는 가정이었습니다.(2)
고넬료에게 여호와 신앙이 들어오고 난 뒤에 그가 했던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2절을 다시 봅시다. 첫 번째는 백성을 구제하는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고넬료의 경건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구제는 이웃을 향한 것입니다.
고넬료는 여호와 신앙을 수용했습니다.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기도가 점점 더 깊어갑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하나님이 삶 속에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담당하는 지역에 있는 헐벗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제를 털어 구제하기 시작합니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이런 경건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4절.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구제를 하지만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면 그 구제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구제입니다. 기도를 하지만 하나님이 들으시지 않으면 그 기도는 위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사람의 귀에 하는 기도입니다.
고넬료는 어쩌다 한 번 구제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 한 번 기도한 것도 아닙니다. 그의 경건은 지속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건이 열매를 맺습니다.
1)먼저,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이 변화됩니다.
7절을 보면, 고넬료는 천사의 지시를 받고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초청하기 위해 그의 하인과 부하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미 그의 부하는 경건한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 역시 로마의 군인입니다. 백부장의 신앙이 이미 그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2)또 24절을 다시 봅시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해 놓고 자신의 가족은 물론이고 친척과 친구들까지 모아 놓고 기다립니다. 이들이 왜 고넬료의 집에 와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그것은 고넬료의 평소의 삶 때문입니다. 기도만으로 초청에 응해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자의 인격이 포함될 때 초청의 역사를 큽니다. 고넬료의 집에 모여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고넬료의 인품과 삶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메시지를 요약하여 한 단어로 말한다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을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하면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마22:37-40)
사랑하게 되면 첫째로,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 하고, 둘째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주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즐겨할 것입니다. 어떻게 있는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가 무엇을 구하여서 얻는 것이기 이전에 우선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면요? 그 사랑하는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주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이 질문에 정확한 답을 제시하셨습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나의 이웃입니다.
여러분, 이번 명절에 특별히 우리의 가족과 일가친척을 가슴에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 가운에 나를 필요로 하는 자가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나의 위로와 격려, 나의 시간, 나의 물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이 우리의 이웃입니다.
섬김의 희생이 없이는 가족구원, 가문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족이, 우리의 가문이 온전한 그리스도인 가족, 가문(Family)가 되기 위해 먼저, 거룩한 뜻, 비전을 소유하십시오. 그리고 또 그들을 위해 섬기십시오. 여러분의 당대에, 아니 멀지 않은 시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 되지 못한 가정의 안타까운 사정을 들어봅시다. 우리에게 믿음의 가문을 세우기 위한 소원을 품읍시다. 모두 함께 간절하게 자신을 위하여 다른 가정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고넬료 가정처럼 (행10:24-25)
고넬료 가정처럼 (행10:24-25)
성경에 보면 많은 가정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 노아, 욥, 나오미의 가정과 이삭의 신혼부부 가정이 있는가 하면 신약의 나사로, 삭개오, 고넬료의 가정 등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 고넬료의 가정을 주목합니다. 우리에게 고넬료의 가정은 은혜를 받는 가정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이 은혜를 받으려면 고넬료의 가정을 배워야 합니다. 요즘 가정세미나가 큰 사역의 중요성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청교도 가정이 가장 복음적인 가정의 모델로 제시됩니다. 특히 청교도 가정의 3대 교육지침이 아주 본받을만 합니다.
첫째 자식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하나님의 것으로 드리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자녀를 가르치는 선생은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부모의 의지와 꿈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심어준다는 말입니다. 셋째는 교육은 설득이 아니라 모범이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모범을 보여주면서 훈련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오늘 고넬료의 가정을 통해 모두가 은혜 받는 가정으로 세워 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준비된 집회
본문에 보면 고넬료의 가정에서 베드로를 모시고 집회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단순한 종교행사 차원으로 보기보다는 고넬료의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24절에 보면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라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초청해놓고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서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여러분 집회할 때 나 혼자 오는 것이 더 은혜롭습니까? 내가 어떤 사람과 함께 와서 참석할 때에 더 은혜롭습니까? 물론 후자입니다. 혼자 와서 듣는 것과 함께 불러모아서 듣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달리 나타납니다. 그런 점에서 고넬료는 은혜를 안받을 수가 없습니다. 일가와 친구들까지 불러모았던 고넬료의 열정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었고 자기만 은혜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함께 은혜받게 한 역할을 한 점에서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부부가 한 사람이라도 은혜받아야 그 집이 유지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은혜받는 것입니다. 일가와 친척들까지도 함께 모일 수 있는 가정이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받습니다.
미국의 교회와 사회가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점이 1950년대입니다. 이 때가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고 세계를 주도하는 강력한 힘이 가장 폭발적으로 나타났던 때입니다. 우리 나라는 한국동란을 만나 비참한 세월을 보낸 시기였지만 미국은 세계를 호령하는 힘을 가진 나라로 평가됩니다. 1950년대의 미국가정이 가장 견고한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이후에 핵가족 바람, 주말문화가 미국의 교회와 가정을 무너뜨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교계의 지도자 한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작년 연말에 일급호텔 모임에 초청되어 갔는데 유독 그날 저녁에는 가족단위로 식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옆 테이블에 놓인 케잌을 보니 자녀의 생일잔치를 해주는 자리였습니다. 아이의 친구들과 심지어 그의 부모들까지 청하여 생일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 분은 왜 우리가 3만8천원짜리 식사로 아이들 생일잔치를 베풀어주어야 하며, 이 식탁 앞에 아이들 생일을 자랑삼아 잔치를 벌이고 있는 한국 부모들의 모습에서 그날 밥맛을 잃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분수를 넘는 격에 맞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가정이 무엇을 추구해야 될 것인가 라는 점에서 심각한 반성을 해야 합니다. 성도의 가정은 일가 친척들이나 가까운 친구들, 믿는 성도들이나 누구든지 그 집에 가기를 좋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구역예배를 드리는데 누군가 일가와 친척을 불러모은 고넬료의 역할을 하는 구역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모든 사람이 오고싶어 하도록 문턱을 낮추어 함께 모이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고관가정입니다. 이 가정의 문을 활짝 열고 일가와 친구들을 초청하여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는 고넬료의 모습에서 우리에게 또 다른 가정의 모습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자세
둘째는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기다리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기다리는 과정없이 바로 된다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기다리는 기간없이 혼사를 치른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혼사에는 준비기간이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기도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고넬료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준비하며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기다림의 과정은 매우 영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성경에 기다린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준다는 약속을 해놓고 25년 동안 기다리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 기다림이 아브라함에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출생에 대한 네 가지 유형이 있는데 제일 행복한 출생은 기다리다가 태어나는 생명입니다. 할아버지나 남편, 본인이 기다리다가 태어나는 생명이 축복된 생명입니다. 두 번째는 준비되지 않은 생명입니다. 가족계획을 했는데도 예기치 못하게 태어나는 생명은 당황하게 합니다. 더 안 좋은 생명은 실수로 태어나는 생명입니다. 이것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올무가 됩니다. 요즘 후회스러운 출생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 최악의 상황에서 강제로 태어나는 생명이 있습니다. 성폭행을 당하는 경우는 한평생 상처를 안고 삽니다. 다같이 이 땅에 태어나도 환영을 받으면서 기다리다가 축복 속에서 태어나는 생명은 오늘 성도들에게 큰 교훈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복을 받아도 기다리다가 받으셔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주더라도 기다리는 과정을 두고 주시기 바랍니다. ‘얘야, 내가 언젠가 네게 선물을 줄텐데 하나님 앞에 한번 기도해 보렴. 하나님이 아마 좋은 선물을 안 주시겠니?’라는 간격을 두고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은혜받기 위해서는 기다리는 준비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엎드려 절함
드디어 고넬료가 기다린 끝에 베드로가 자기 집으로 왔습니다. 이 때 고넬료의 3가지 주목할 행동이 있습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기다리면서 베드로가 올 때는 엎드려 절했습니다. 고넬료가 엎드려 절했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입니다. 백부장인 고넬료는 식민지 국가의 고관으로 로마의 군인입니다. 그런데 피식민지 국민 앞에 절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치 일제 시대에 경찰서장이 우리 동네 사람 앞에 절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베드로는 사회적인 지위가 없는 갈릴리 어부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영적인 면에서이지만 이 베드로 앞에 엎드려 절하는 고넬료의 모습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로마군인은 황제 앞에서 절하고 그 황제의 신발에 입을 맛추는 것이 예라고 합니다. 황제 외에는 무릎을 꿇으면 안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무릎꿇고 엎드렸다는 동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일어났던 그 일과 고넬료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그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33절에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서 고넬료가 베드로를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영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어부로 보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국가의 국민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알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여기서 고넬료가 얼마나 영성이 충만한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모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주께서 당신께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합니다”라는 말이 제일 핵심되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엎드리고 있습니다.
어느 가정에 아버지가 줄담배를 피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아내와 아이들이 담배를 끊으라고 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초등학교 다니는 딸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폐가 나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당부하기를 탁한 공기나 담배연기를 마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왔는데 영문을 모르는 아버지는 또 줄담배를 피우기 시작합니다. 그때 딸이 ‘아빠, 엄마랑 오늘 병원에 갔는데 폐가 나쁘데요. 의사선생님이 담배연기가 안좋데요.’ 딸이 누워서 아빠를 쳐다보며 이 말을 조용히 하는데 그 말을 듣던 아버지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딸의 말에 충격을 받고는 그때부터 완전히 끊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왜 가능한 줄 아십니까? 딸이 앓고 있는 광경을 보고 내가 너를 위해서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며 평소에 무엇이든 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 한마디에 담배를 끊을 수 있었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엎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 만큼 당신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은 내가 무엇이든 순종하겠다는 마음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 행동이 가능한 일입니다. 고넬료는 오늘 우리에게 아름다운 가정의 모형이며 가정을 살릴 수 있는 신앙인의 모델로 우리 앞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 어느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열린 자세로 세워져 있다면 그 가정은 소망이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모이게 하는 사람, 기다릴 줄 아는 사람,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습니다.
삶의 매너를 갖추자
미 국무성에 근무하는 정운복 박사의 ‘미국인들은 왜 한국인을 싫어하는가’라는 글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정직한데 이상하게도 끝에 가서는 속에 부정직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두 번째 준법정신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매너를 중요시하는데 우리 나라 사람은 도무지 공중도덕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세 번째 자기주장만 내세웁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배려할 줄 모릅니다. 흑인들은 가지고 있을수록 사람들에게 베푼다고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돈을 벌수록 상대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네 번째 건방지고 덤벙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실속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섯 번째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면이 약해서 행동하고는 후회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정에 맞으면 집도 팝니다. 그러나 감정을 내세우기 전에 기도해야 되고 생각해야 됩니다. 이성적인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섯 번째 협동정신이 부족합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것과 같습니다.
일곱 번째 편견이 아주 심하다는 것입니다. 한쪽 말만 듣고는 그대로 단정하는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무서운 것은 오해와 편견입니다. 오해하지 않도록 상대방 말을 들어야 되고 편견을 갖지 않도록 단정하는 것을 유보해야 됩니다.
여덟 번째 맹목적인 흉내를 잘 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창조성이 없는 모방의 천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정운복 박사가 미국에 살면서 동족 때문에 곤혹을 치뤘던 일들이 바로 이런 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글은 정운복 박사가 동족을 비난하려고 쓴 것이 아니라 미국 사회에서 한국인들이 실패하는 것을 안타까워해서 교훈을 주려고 정리한 것입니다.
맺는 말
하나님이 보실 때 고넬료 같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그 모습을 갖출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다른 것으로 장식하지 말고 고넬료가 어떤 가정으로 만들고 있는지를 영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 가정에 믿는 자와 안믿는 자들이 자주 오게 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기다리는 신앙인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는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 행동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고넬료의 가정이 성도들의 가정처럼 세워져 가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용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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